위클리비즈

"전통없는 혁신, 실패한다… 혁신없는 전통, 사라진다"

People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2011.05.21 03:07 수정 2011.05.25 09:36

獨 주방용품 휘슬러캡카 CEO 인터뷰 전통을 지키는 고집 名品이 오래된다고 퇴색하나개선 아닌 '혁신' 돼야 신제품 단종 땐 20년치 여유분 만들어그것도 고객 배려하는 '전통'

휘슬러(Fissler)는 독일이 낳은 세계 최고의 명품 주방기구 회사다. 200개가 넘는 특허를 무기로 독일을 포함해 72개국에 진출해 있다. 하지만 휘슬러는 166년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3만5000명의 소도시 이다-오버슈타인(Idar-Oberstein)에서만 제품을 생산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이런 게르만 기업이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진출 국가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 혁신을 시작한 것은 40년 전. 한국 간호사와 광부가 휘슬러를 변신시켰다.

휘슬러의 간판 상품인 압력솥은 원래 독일에서 돼지고기를 삶는 용도로 사용됐다. 여기에 쌀밥을 지어 먹기 시작한 사람들이 1960~70년대 독일로 간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이었다. 그들은 휘슬러 압력솥에서 나온 쌀밥을 먹으면서 고향의 향기를 느꼈다. 그리고 조국에 있는 부모 형제에게 휘슬러 압력솥을 선물로 보냈다.

70년대 정부미(政府米)에 익숙했던 한국인에게 독일에서 온 압력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1년 묵은 정부미로 지은 밥 맛이 햅쌀 맛과 비슷했던 것이다. 휘슬러 압력솥의 선풍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휘슬러 경영진은 "정부미를 햅쌀 밥으로 만들었다"는 한국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1972년 한국을 겨냥해 개발한 '솔라(solar) 시리즈'는 40년 동안 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 중이다. 휘슬러는 한국인을 위한 전용 생산라인을 만들고 한국인을 위한 R&D 인력을 고용했다.

휘슬러의 한국시장 매출액은 72개국 가운데 2위. 3~4년 후 독일까지 제치고 1위로 올라설 전망이다. 마커스 캡카(Markus H Kepka·49) 휘슬러 글로벌 CEO에게 '한국형 휘슬러'의 성공 비결을 들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철로 3시간 거리에 3만5000명이 사는 마을이 있다. 예부터 이 동네사람들은 금속세공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이들은 바로 옆 광산(鑛山)을 젖줄 삼고 거기서 나오는 금속을 두들기며 장인 정신을 길렀다.

칼 필립 휘슬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곳은 지금도 벽촌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발명가 기질이 번득였던 그가 금속 중 스테인리스스틸에 주목했다. 녹슬지 않고 내구성 강한 그것으로 그는 주방기구를 만들었다.

마침내 1845년 '휘슬러(Fissler)'가 첫발을 디뎠다. 세계 여성들을 설레게 만든 명품 주방기구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휘슬러가 걸어온 길은 주방기구의 역사이자 소도시 '이다-오버슈타인(Idar-Oberstein)'의 성장사가 됐다.

1855년 휘슬러는 세계에서 처음 주방 제작에 증기기관을 썼다. 1910년 단열(斷熱)소재 손잡이를 선보여 주부를 기쁘게 하더니 1953년에는 다단계 조절기가 달린 압력솥을 내놓았다. '최초'와 '특허'는 이후도 숨 가쁘게 등장한다. 17일 강남구 청담동 뒷골목 카페 지하에서 중년의 독일인이 '원맨쇼'를 벌이고 있었다. 묵직한 냄비를 들 때는 얼굴이 벌게졌다. 프라이팬을 치켜올릴 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씩 웃으며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쑥 뽑았다.

브랜드가치만 7조원인 휘슬러의 글로벌 CEO 마커스 캡카가 말했다. "앞으로 3~4년 뒤 한국이 독일을 제치고 휘슬러 판매 1위국이 될 것이라 믿어요. 욕심 같아선 세대당 우리 제품 5~6개 정도를 썼으면 좋겠지만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돼지고기 아니면 감자를 삶거나 소시지 구워 맥주를 마실 것 같은 독일인들이 왜 쌀밥 만드는 압력솥을 개발했으며 라면 끓이는 냄비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사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압력솥을 처음 시장에 내놓은 게 1953년입니다. 세계 처음이지만 휘슬러의 역사에서 이정표 같은 작품입니다. 쿡웨어(cookware) 중 가장 고난도의 기술이 집약된 게 압력솥이거든요. 시장의 헤게모니를 쥐게 됐지요."

캡카 대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3,4000명의 한국 간호사와 광부들이 독일에 왔지요. 그들의 주식이 쌀이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압력솥으로 밥을 지은 겁니다."

독일에서 구한 쌀에서 간호사와 광부들의 고향의 맛을 발견하게 됐다. 그러자 이 인정 많은 민족의 가슴에 작은 소망이 생겼다. 조국의 부모형제에게 압력솥 하나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환자를 돌보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휘슬러는 한국을 연구했고 1972년 한국을 겨냥한 '솔라(Solar) 시리즈'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40년 장기베스트셀러다. 그러면서 이렇게 변죽을 올렸다. "휘슬러 압력솥 밥 먹고 자란 아들은 장가가도 휘슬러 밥만 찾는다!"

마커스 캡카 휘슬러 글로벌 CEO는“전 통 없는 혁신은 실패 하고 혁신 없이 전통 만 고수하면 시장에 서 퇴출당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론 전통과 혁신의 비율 이 4대 6인 게 제일 이상적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한국에 올인한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정부미를 안 먹습니다.

"휘슬러가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유를 세 가지만 말할게요. 첫째,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만 내놓습니다. 둘째, 제품의 우수성 외에 영업력이 강하고 서비스가 남다릅니다. 셋째 , 감성 캠페인이 주효했습니다."

―감성 캠페인은 유명 연예인이나 예술인을 등장시킨 일련의 광고를 말하는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허영(虛榮) 마케팅 아닌가요?

"한국과 유럽의 주부들이 주방에 머무는 시간을 비교해본 적이 있나요? 한국이 1.5배에서 2배나 깁니다. 휘슬러가 할 일은 뭘까요. 주방에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가치 있는 행위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가족음식을 책임지는 주부가 갖고 싶은 쿡웨어 브랜드를 선택하는 데 사치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을 많이 연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주부들은 아직도 전기 열원(熱源)보다 직화(直火) 열원을 좋아합니다. 저흰 한국에 나오는 제품의 바닥 두께를 조절했죠. 한국 주부들은 뼈를 우리거나 국을 끓이잖아요. 손잡이가 불에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다른 나라보다 1㎝ 더 높였습니다."

―한국 전용라인이 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상품을 만들었습니까.

"(압력솥을 들어 올리며) 이 디자인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워낙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압력의 세기를 세밀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4단계 조절을 할 수 있게 했고요, 워낙 오랜 시간 열을 가하는 요리가 많아 본체 안의 압력을 조절하려고 뚜껑에 스팀 홀(Steam hall)을 만들었지요.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칼?

"(식칼을 쑥 뽑으며) 겁먹지 마세요. 이달 말에 처음 출시될 건데 먼저 공개할게요. 이렇게 손잡이 부분의 금속이 트위스트(twist)된 게 여성용 '퍼펙션', 작은 사각형 세 개가 들어 있는 게 남성용 '프로패션'입니다. 한국 여성은 손 크기가 유럽인보다 작지만 재료를 썰 때 상대적으로 힘을 많이 줍니다. 그래서 칼날에 10도 정도 에지를 주고 날과 손잡이의 무게 비율을 6대 4로 했어요. 다른 나라는 7대 3입니다."

―칼의 성능은 강도 아닌가요.

"한국에선 김치를 써는 경우가 많죠? 그럼 수분, 염분에 많이 노출돼 무뎌질 수가 있습니다만 우리 칼은 강도가 타사 제품보다 4배나 강합니다. 칼날도 쉽게 상하지 않도록 특수하게 처리했고요. 한마디로 프리미엄급이란 뜻이죠."

―신혼부부용 주방 세트가 460만원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들은 단품보다 세트를 선호하는데 미국이나 유럽은 그렇지 않죠. 잘 팔려서 좋긴 한데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단품을 좋아하는 나라가 있긴 하지만 세트째 구입하는 걸 좋아하는 나라도 많아요. 특별히 한국만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세트의 구성은 나라마다 달라요."

―아까 한국의 세대마다 5~6개씩 휘슬러 주방기구를 썼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몇개 정도 가지면 요리하는 데 불편이 없을까요.

"제 생각으론 10개 정도면 충분하다고 봐요. 전 25개 가지고 있지만."

■"전통 40%, 혁신 60%"

캡카 대표는 휘슬러의 자랑은 '장인정신'과 '전통을 지키려는 고집'이라고 했다. 세계 글로벌 기업들이 손쉽게 선택하는 OEM방식을 휘슬러가 끝까지 거부하고 이다-오버슈타인에서 전 제품을 만드는 게 그걸 상징한다고 말했다.

―본사의 인력이 어느 정도 규모입니까.

"블루칼라가 600명, 화이트칼라는 400명 정도입니다. 연구진은 내부에 25명, 외부 용역으로 비슷한 숫자가 있고요. 2대째 근무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것도 전통일 텐데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색깔만 바꿔서 내놓는다든지, 세일즈를 위한 제품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약점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휘슬러 가문(家門)은 사업이 아닌 발명가 마인드가 강하기 때문에 '개선'이 아닌 '혁신'수준까지 돼야 비로소 제품을 내놓습니다."

―'솔라시리즈'같은 것도 인기있다지만 40년은 너무한 거 아닌가요, 구식이 될 텐데.

"명품이 오래된다고 퇴색하진 않잖아요. 20년 된 솔라 제품을 고객들이 '빈티지'라고 하면서 설거지할 때도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40년이 오래됐다지만 전 이 클래식한 패턴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럼 부품도 그 기간만큼 생산해야 한다는 얘긴데….

"저흰 쉽게 단종을 하지 않지만 단종하더라도 부품 여유분을 20년치가량 만들어둡니다. 그런 것도 고객을 배려하는 전통 가운데 하나겠죠."

―휘슬러 제품의 내구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호평하는 분도 있지만 인터넷 사이트 품평에선 그리 길지 않다는 혹평도 꽤 보이던데.

"보통 품질보증기간을 5년으로 잡고 있지만 팬은 15~20년, 칼과 압력솥은 30년, 내부 코팅은 5년 정도라고 봅니다. 물론 자주 교체해야 하는 부품이 있긴 하지만 그건 값이 5~10유로 정도로 싸죠."

―서비스가 명성만큼 못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소비자 만족도를 측정할 때 제품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의 만족도보다 애프터서비스를 잘 해줬을 때의 만족도가 훨씬 높습니다. 저희는 AS뿐 아니라 조리법을 가르쳐주는 핫라인을 운영하고 있고 원하시는 분은 직접 가정을 방문해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고 있습니다. 펄펄 끓여 태운 냄비를 세척까지 해 보내준 적도 있고요."

―쾰른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했고 MBA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통이 중요할까요, 혁신이 중요할까요.

"전통 없는 혁신은 실패합니다. 한 연구에서도 95% 이상이 시장에서 실패하는 것으로 조사됐어요. 반대의 경우, 즉 혁신 없는 전통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어요."

―한 가지만 꼽는다면요.

"수치를 원하신다면 전 전통이 40%, 혁신이 60%라고 봅니다."

―아리송한 답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휘슬러가 보유한 특허는 200개가 넘습니다. 그런데 특허등록 자체가 기술을 노출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특허등록을 심사숙고할 때가 있어요. 게다가 소비자는 냉정합니다."

■"한국시장 이상 없다"

캡카 대표는 향후 5년 내 한국시장에서의 매출 목표가 3000억원이라고 했다. 지금보다 몇배 높은 규모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시장은 앞으로 15년에서 20년 동안 성장의 한계가 없다고 본다"고 했다. 가히 '애정'에 가까운 믿음이다.

―왜 한국과 비슷한 일본에서의 매출액은 한국보다 한참 못 미칠까요.

"한국에는 지사(支社)가 13년 전에 생겼어요. 일본은 2008년 이전까지 독점 수입업자가 유통을 맡았어요. 2년 전에야 자회사를 설립했는데 연간 매출신장이 25%나 됩니다. 10년 후면 일본도 한국처럼 성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통망 탓이라지만 독일과 일본의 산업구조랄까, 장인정신이 비슷하기 때문에 덜 선호하는 건 아닐까요.

"그런 이유는 제한적입니다. 한국에서 우리는 백화점이나 갤러리를 통해 상품을 판매합니다. 그러면서 쿠킹클래스를 열고 레시피를 제공하는 등의 부가서비스를 합니다. 일본은 그게 힘들어요. 아주 뚫고 들어가기 힘든 시장입니다."

―2010년 휘슬러로 옮겼는데 원래 주방기구 전문가였습니까.

"제가 거친 회사들이 다 가정용품(라이프하이트)이나 식품(닥터 아우구스트 외트커)이었습니다. 1991년부터 직장생활을 했어요."

―경험이 많아도 새 직장은 언제나 힘들지요.

"이곳에 와서 아시아시장을 이해하기 위해 한·중·일 요리 콘테스트 현장에 가 직접 요리를 하고 주부들이 어떤 용품을 선호하는지를 체험했습니다. 덴푸라(일본 튀김)와 딤섬(중국식 만두)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지요."

―휘슬러에 와서 '나의 가치를 이 부분에서 입증하겠다'고 마음먹은 분야가 있었습니까.

"'프리미엄 익스팬션(Premium Expansion)'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품을 선택한 소비자에게 자부심을 주는 게 진정한 프리미엄이라는 거죠. 휘슬러 제품이 뛰어나지만 거기서 멈춘 게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까지 끌고 가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휘슬러는 아직도 휘슬러 가문이 주인인데 오너들이 업무에 어느 정도 간여하나요.

"휘슬러가는 발명가 집안으로 혁신을 중요시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창조적인 자세로 열정을 제품에 담아냈는가를 살피는 편입니다. 전 사업가죠. 우리 회사는 상당히 가족적인 분위기입니다."

―글로벌 CEO라면 어학은 어느 정도 해야 할까요.

"독일인이니 독일어를 아주 유창하게 합니다. 영어도 그 정도 수준이고요. 네덜란드어는 잘 이해하는 수준, 스페인어는 기초적인 정도입니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여성을 사귀었다는데 혹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요? 독일의 부인껜 알리지 않겠습니다.

"전 한국 여성을 이해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어요. 다만 베르베르를 만나면 제가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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