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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까지 대비한 '시나리오 경영' 셸, OPEC의 석유무기화 예측해 살아남아

김경준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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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07.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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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와 가정은 완전히 다른 단어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우려는 막연히 걱정하는 심리적 태도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한 가정은 현실적인 가능성을 상정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이다. 사업가는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최선을 추구해야 한다.

위기 상황을 가정해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든 뒤 각각의 대응책을 세워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경영 기법을 '시나리오 경영'이라고 한다. 이를 개발하고 실무에 적용한 최초의 기업이 영국의 글로벌 석유회사 셸(Shell)이다. 1960년대 셸은 100년 역사를 이어온 우량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분석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위기 발생 가능성을 경쟁자들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재빠르게 대응했다는 것이다. 셸은 여기서 시나리오 경영의 개념을 만들었다. 위기를 예고하는 현상들을 정리해 목록을 만들고 전쟁, 시장 붕괴 등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를 짰다. '전쟁 게임'이라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경영진을 대상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교육했다.

시나리오 경영은 1973년 오일 쇼크 때 진가를 발휘했다. 셸은 1960년 중동 국가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출범시키자 이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해 원유를 무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셸은 1975년 OPEC과 세계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유가를 두고 재협상을 벌이기 전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시나리오에 따라 원유 비축량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중동의 산유국 당국자들과 관계도 더 신경을 써 우군으로 만들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 전쟁이 터지고 오일 쇼크가 닥쳤다. 안정세였던 유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세계 에너지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하지만 셸은 오히려 세계 2위 메이저 회사로 급부상했다. 미리 준비한 셸엔 최악의 위기가 최고의 기회였던 셈이다. 이후 셸의 시나리오 경영은 전 세계로 퍼져 오늘날 보편적인 '전략 기획(strategic planning)'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전쟁터에 나갈 때 운이 나쁜 상황을 가정하고 사전에 철저하게 대비했다고 한다. "작전을 세울 때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겁쟁이가 된다. 나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불리한 조건을 과장한다. 천천히 계획하고 빨리 실행하는 것이 관건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했던 나폴레옹이 위험과 위기를 지배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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