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Cover story

"세금 많이 걷는 큰 정부가 문제다"… 법인세 48%를 34%로 낮춰 호황 이끌어

배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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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05.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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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레이거노믹스의 창시자’ 아서 래퍼가 움직인 지도자들


레이건 前 대통령의 재정정책

1980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경선 당시 로널드 레이건 후보는 감세(減稅)를 골자로 한 경제 공약을 내놓았다. 적극적인 감세 정책을 펼치면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고 고소득층은 소비를 늘려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요지였다. 당시 40세이던 경제학자 아서 래퍼는 "세율을 높이면 처음에는 정부의 세금 수입이 늘어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감소한다. 세율이 높아지면 기업과 고소득층이 투자를 포기하거나 해외로 떠나기 때문"이라며 레이건 후보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공급 중심의 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당시 미국은 오일 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으로 경기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 자체가 문제다"라며 거대한 정부가 불황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실제로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민주당) 대통령의 뉴딜정책 이후로 1950년대 '풍요한 사회'를 거치면서 미국 정부는 비대해졌다. 미 정부는 복지정책 시행 등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개인과 기업은 투자를 방해받아 결국 경제가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레이건 대통령은 본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 주장에는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배우 시절 자신이 번 돈의 90%를 세금으로 낸 적이 있었다. 세율이 지나치게 높다 보니 배우들은 영화를 한두 편 찍고는 일을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법인세율은 48%에서 34%로 대폭 낮췄다. 과거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풍요한 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연방예산도 삭감했다. 기업에는 투자비 세금 공제와 감가상각비 손비 허용을 확대해 투자 활성화를 유도했다. 기업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도 철폐했다.

감세와 금리 인상으로 성장과 물가 잡아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 정책과 더불어 금리 인상도 단행했다. 전임 지미 카터(민주당) 대통령 시절 10.8%에 달하던 연간 평균 물가 상승률을 잡기 위해 금리를 단기간에 급격히 인상, 물가상승률을 3분의 1 수준인 3.8%로 낮췄다. 이러한 종합적인 경제정책 덕택에 재임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7%에서 3.5%로 높아졌다. 1984년 경제성장률은 7.26%에 달하기도 했다. 실업률은 1980년 7%에서 1988년 5.4%로 낮아졌다. 감세에도 세금 수입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미국 세금 수입 총액은 1980년 7307억달러에서 1988년 1조3342억달러로 증가했다.

감세는 정부가 사용할 재원의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작은 정부'와 동의어로 통한다. 레이건은 루스벨트 이후 시행해 온 '큰 정부' 정책을 접고 작은 정부로 향했다. 간섭보다는 자유, 집단보다는 개인, 분배보다는 성장, 의존보다는 자치를 강조했다. 미국이 이러한 방향으로 가면 미국 국민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미국이 또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 시절 요동치던 경제를 안정시키고 1990년대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장기 호황 토대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비판도 있다. 그의 재임 시절 8년 동안 소련과의 군비 경쟁 때문에 국가 채무가 9090억달러에서 2조8679억달러로 3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 부유층을 위주로 한 감세 정책으로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며 사회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1.정치적 연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8년 11월 16일 백악관 만찬에서 퇴임을 앞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춤을 추고 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1년 대통령 취임 후 첫 국빈 초대 만찬도 대처와 함께 했고, 이날 마지막 국빈 만찬도 그녀와 함께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2.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뉴욕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미국의 정치 이념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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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치적 연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8년 11월 16일 백악관 만찬에서 퇴임을 앞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춤을 추고 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1년 대통령 취임 후 첫 국빈 초대 만찬도 대처와 함께 했고, 이날 마지막 국빈 만찬도 그녀와 함께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2.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뉴욕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미국의 정치 이념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소득세율 대폭 인하·공기업 민영화로 ‘영국病’ 잡아

대처 前 영국 총리의 재정정책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정책 철학은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고 불린다. 초대 총리 로버트 월폴 경부터 현재 데이비드 캐머런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배출된 57명의 총리 중 이름 다음에 ‘ism(주의)’이 붙는 유일한 총리이다.

한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했던 영국의 경제와 사회 복지 모델은 전 세계적으로 칭송을 받던 모범 정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한 지속적인 임금 상승, 그리고 생산성의 저하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소위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病)’에 시달렸다. 물가 상승률은 20%를 넘어섰고, 영국 국가 재정에서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육박했다. 1960~1970년대 영국 근로자의 1인당 생산성은 미국보다 50% 낮았고, 서독보다 25% 낮았다.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60년대에 세계 9위였지만, 1971년에 15위, 1976년에 18위까지 급격하게 추락했다. 급기야 1976년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 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이런 와중에 1978년 겨울, 영국의 운수·병원·청소·자동차노조가 연대파업에 나서면서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 찾아왔다. 4개월간에 걸친 연대파업 기간에 교통망이 마비되고 거리마다 쓰레기가 썩은 내를 내며 쌓여 갔다. 급기야는 입원을 거부당한 환자가 죽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노조와 노동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폭발했다.

결국 1979년 3월 노동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이 의회를 통과했고, 그해 5월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했다. 보수당 당수였던 대처는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성했다. 레이건은 그보다 1년 반 늦은 1981년 1월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정치적 동반자’로 평가받는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대처 총리 정책, 레이거노믹스와 닮아

대처 전 총리의 경제 정책도 레이거노믹스와 닮은꼴이다. 당시 영국의 최고소득세율은 80%에 달했다. 투자소득세 등 다른 세목까지 합치면 최고소득세율이 95%에 달했다는 분석도 있다. 대처 전 총리는 높은 세율과 과도한 복지 혜택이 영국병의 주범이라고 보고 최고소득세율을 40%로 낮추고, 정부 지출 축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다. 고질적인 재정 적자 요인이던 공기업 민영화도 대처리즘의 특징이었다. 대처 전 총리는 공영 임대주택을 매각하고, 영국통신과 영국석유 같은 굵직한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대대적인 개혁의 결과는 어땠을까. 실질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대처 총리 집권 초인 1980년 42.5%이던 것이 1990년 28.6%까지 떨어졌다. 경제성장률도 1980년 마이너스 2.0%에서 1988년 5.7%까지 점차 올랐다. 1980년 18%이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6% 선으로 잡혔다.

불황 타개로 자신감을 얻은 대처는 임기 말이 될수록 더욱 강한 정책을 취했다. 심지어 1988년 도입한 인두세(人頭稅)는 전국적인 폭동을 유발했다. 인두세는 소득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1인당 일정액의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타격을 주는 세제이다. 이 때문에 대처리즘은 영국병을 치료하고 영국을 다시 부활시켰다는 전반적인 호평 속에서도 빈부격차 확대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9·11테러, 이라크戰 속 추가 감세… 재정 관리에 실패

조지 W 부시 前 대통령의 재정정책

조지 W 부시(2001~2009년 재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첫해 미국 경기가 닷컴버블의 여파로 위축된 것과 반대로 미 연방 재정은 탄탄한 상태였다. 당시 미국 정부의 재정 흑자는 1000억달러가 넘었다. 빌 클린턴(1993~2001년 재임) 대통령이 정부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심지어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정부 재정 흑자가 과도하면 경제를 왜곡시킬 수 있다”며 걱정했다. 감세 정책은 정부의 예산 낭비를 줄이고 작은 정부를 구현할 수 있는 합당한 정책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임기 첫해 부시 대통령은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39.6%에서 35%로 낮췄다.

부시 대통령 감세 정책의 뿌리는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설계자인 래퍼 전 USC 교수에게서 찾을 수 있다. 1974년 미국 워싱턴D.C.의 한 식당에서 30대 초반의 경제학자 아서 래퍼가 냅킨에 종(鐘) 모양 곡선을 그려 세율과 세수의 관계를 설명할 때 함께 자리한 상대가 바로 나중에 부시 정권의 실세가 된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감세 정책은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9·11테러가 터지면서 기업 활동이 현저하게 위축됐고, 소비 심리는 얼어붙었다. 게다가 2003년 이라크 전쟁까지 터지면서 재정 흑자가 순식간에 재정 적자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부시 대통령은 2003년 또 한 번의 감세안을 내놓았다. 경기 침체를 돌파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감세 카드를 내민 것이다.

래퍼 “세율 낮추는 것 만큼 재정지출 줄였어야”

부시 대통령의 추가 감세안에 대한 경제학계의 비판 여론은 거셌다. 부시 대통령 경제정책의 대표적인 비판자인 폴 크루그먼 당시 프린스턴대 교수는 “감세 정책은 부시의 사기”라고 주장했다. 이라크 전쟁 비용과 의료보험료, 교육 등 정부 예산 수요가 날로 늘어만 가는데, 세수를 줄이면 재정 적자가 확대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한때 부시 대통령을 지지했던 공급주의 경제학자들조차 부시에게서 등을 돌렸다. 후버연구소의 밀턴 프리드먼 교수, 하버드대의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 등은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이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의 임기 중 평균 경제성장률은 2.1%로 전임 클린턴 행정부(3.9%)에 비해 떨어졌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민주당 의원은 “내 남편(빌 클린턴 대통령)이 튼튼하게 관리해 온 재정을 부시 대통령이 잘못 관리해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 메우고 있는 형편”이라고 부시 대통령을 비난했다.

감세주의자인 래퍼 전 교수조차도 부시 대통령을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꼽았다. 래퍼 전 교수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세율을 낮추는 것만큼, 재정 지출 제한, 건전한 통화정책, 최소한의 규제, 자유무역 등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며 “부시 대통령은 2004년까지 금리를 1% 수준으로 내린 데다 재정 지출을 늘려 미국 경제를 망가트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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