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Cover story

"최고의 복지는 고연봉 일자리… 세금 많이 내는 부자는 국가에 귀한 손님"

내슈빌(미국)=배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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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05.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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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공급주의 경제학의 아버지, 아서 래퍼 전(前) USC 교수


아서 래퍼 전(前) USC 교수(래퍼어소시에이츠 대표)는 10여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테네시주로 이주를 결심하고 당시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찾아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당신이 세금을 올려서 여길 떠납니다." '터미네이터'(처단자) 별명을 가진 슈워제네거 주지사에게 어떻게 감히 정면 비판했느냐고 농반진반 물어봤다. 그는 "그래서 멀리 떨어진 탁자 반대편에서 소리만 질렀죠"라며 크게 웃었다. 슈워제네거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캘리포니아주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당초 래퍼 조언과 달리 각종 세율을 올려 반발을 산 바 있다.

래퍼 전 교수 사무실 2층 벽면에는 레이건 대통령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과 편지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레이건 벽(wall)'으로 부르는 장식이다. 1984년 3월 15일 레이건이 직접 사인해 보낸 편지에 눈길이 갔다.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아트(Art·아서의 애칭)에게. 지난달엔 만나질 못해서 낸시도 매우 아쉬워했다. 나의 정책에 대해 오랫동안 지원해줘 감사하다. 군사비 지출에 대한 의회 반응이 좋지 않아 걱정되지만, 그들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의 정책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도와주길 바란다. 다음번 회의에서 만나길 고대하며."

증세하면 일하고 싶은 마음 줄어

―감세(減稅)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세금은 한마디로 경제성장을 방해할 뿐이다. 더 나쁜 세금과 덜 나쁜 세금만 존재할 뿐이다. 경제학의 핵심은 동기(인센티브)다. 어렵게 생각할 게 없다. 100만원을 버는데 20만원씩 떼어간다면 누가 기분이 좋고 신나게 일하겠나. 반대로 100만원을 벌다가 20만원씩 보너스가 생기면 누구든 일할 맛이 난다. 부를 추구하는 개인과 기업의 욕구를 자극해야 국가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복지정책은 어떻게 감당하나.

"케네디는 '최고의 복지는 고연봉 일자리'라고 했다. 자기가 먹고살려고 다른 사람(부자)을 끌어내리는 식으로 사회가 운영되면 곤란하다. 그럼 결국 둘 다 죽는다. 누구나 번듯한 연봉을 받는 직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복지제도가 있나. 부자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다는 건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경제성장 중추 역할을 하는 부자들의 근로 의욕만 떨어뜨린다. 경제 전체 활력이 감소한다. 정부 지원금을 받는 취약 계층도 '뭐 하러 일하냐'면서 놀고먹으려 한다. 부를 재분배하다 보면 부 전체 규모는 줄어든다. 북한처럼 되는 것이다.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케인스학파이건 신자유주의자이건 상관없다. 간단한 수학이다. (소득 금액이 커질수록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누진세에 리미트(lim·극한) 함수를 적용해보라. 결국 0에 수렴하지 않는가."

―한국 정부가 현재 소득 재분배와 부자 증세를 역점 추진하고 있는데.

"당장 말리고 싶다. 그 정책을 어떤 경제학자가 주도했나. 토론 한판 해야겠다. 사회주의자들이나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다. 높은 세율은 언제나 경제성장에 걸림돌이다. 기업들이 홍콩이나 버뮤다로 왜 자꾸 몰려가겠는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다."(홍콩은 법인세 16.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저 수준이고 버뮤다는 법인세가 아예 없다. 버뮤다는 덕분에 다국적 기업들이 조세 회피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1.아서 래퍼 전 USC 교수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은 '레이건 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아서 래퍼 전 USC 교수가 1970년대 백악관에서 일할 무렵부터 수집한 골동품들이 연구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3.1974년 래퍼 전 교수가 실제로 냅킨에 그렸던 래퍼 곡선. 4.아서 래퍼 전 USC 교수가 각별한 애착을 보인 중국 기마병 모형. /배정원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1.아서 래퍼 전 USC 교수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은 '레이건 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아서 래퍼 전 USC 교수가 1970년대 백악관에서 일할 무렵부터 수집한 골동품들이 연구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3.1974년 래퍼 전 교수가 실제로 냅킨에 그렸던 래퍼 곡선. 4.아서 래퍼 전 USC 교수가 각별한 애착을 보인 중국 기마병 모형. /배정원 기자
감세하자 해외 자금 미국으로 유입

―미국 내에서도 민주당을 중심으로 부자 증세 필요성을 거론하는 이들이 있다.

"부자를 질투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부자를 왜 싫어하나. 자영업자는 단골을 정성껏 모신다. 정부 처지에서 보면 부자는 고액 세금 납부자로 매출(세입)을 늘려주는 최고 고객이다. 단골이나 다름없다. 부자 생일에 축하편지를 보내진 못할망정 그들을 범죄자 취급한다는 게 말이 되나."

―트럼프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세금을 내리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법인세를 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35%에서 평균(23.9%) 이하인 21%로 낮췄다. 덕분에 해외 자금이 미국 내로 흘러 들어오고 있고 미국 경제는 선진국 중 가장 성장세가 뚜렷한 나라가 됐다. 이런 식으로 고용과 생산이 늘면 법인세뿐 아니라 재산세도 늘어 전체적인 세수가 증가한다. 미·중 무역전쟁과 보호무역주의를 제외하면 트럼프 경제는 선전하고 있다."

―이상적인 조세제도는 어떤 것일까.

"기업이나 개인의 근면 동기를 꺾지 않으면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수준이어여 한다. 그러려면 정부 규모를 줄여야 한다. 경제성장을 위해선 5가지가 필요하다. 낮은 세율, 최소한의 규제, 재정지출 제한, 건전한 통화정책, 그리고 자유무역이다. 이 5가지 요소만 지키면 어느 국가나 부유해질 수 있다."

학자는 정치세력과 일할때 돈 받아선 안돼

대화 도중 래퍼 전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신문을 건네면서 "세금을 많이 걷는 주에서 사회기반시설과 공공 서비스가 더 형편없다"는 내용을 담은 칼럼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민주당이 집권한 주(州)들이 세율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이곳에선 예산이 복지와 공무원 지원에 많이 쓰여 효율적으로 집행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담았다.

―경제학계에선 증세를 한 뒤 정부가 재분배를 해 빈부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다.

"그들은 경제학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사실상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경제는 간단하다. 학자는 특정 정치 세력과 일할 때 돈을 받아선 안 된다. 그들에게 정책 근거를 마련해주면서 돈을 받으면 내용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독립적인 자세를 갖고 조언하기 어렵다. 그래서 레이건 시절 자문위원으로 일할 때도 전혀 보수를 받지 않았다. 백악관 회의 때마다 캘리포니아에 살며 워싱턴D.C.까지 비행기로 이동했지만 전부 자비로 처리했다. 대처와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에게 돈을 받으면 '직원'이 된다. 그들이 원하는 논리를 만들어주는 꼭두각시가 된다. 레이건에게도 직설적으로 권고했다. 이 때문에 종종 불화도 있었다. 레이건이 화를 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받고 고객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학자다."

―정치인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닉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 예산국(OMB) 수석경제학자로, 당시 조지 슐츠 국무장관의 오른팔로 일했다. 그때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잘하지도 못했다. 개인적으로 슐츠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닉슨도 좋아했다. 하지만 경제 정책적으로는 의견이 매우 달랐다. 나의 상관이자 고용주이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했던 게 너무 힘들었다. 그때부터 정부에서 돈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부시·오바마 대통령은 정책 실패자

래퍼 전 교수는 공화당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립"이라고 주장했다. 빌 클린턴(민주당)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투표했고,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는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일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경제적으로 실패한 인물은 누군가.

"오바마(민주당)와 조지 W 부시(공화당)다. 이 두 대통령이 집권한 16년은 미국 경제정책 면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금리가 0%로 떨어져 민간 부분의 자금 공급 기능이 사라졌다. 신규 주택 착공 건수 지표는 집계를 시작한 (1959년) 이후 가장 낮은 500까지 떨어졌다. 금융 위기도 이때 발생했다."

래퍼 박사는 인터뷰 내내 연설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토크쇼 진행자처럼 끊임없이 농담을 던졌다.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데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

"즐겁게 살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 굳이 하나 꼽자면 낮잠을 꼭 잔다. 그리고 늘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여전히 세상에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가득하다."

‘세율이 적정선을 넘으면 조세 수입 오히려 줄어’… 감세와 규제 철폐 주장

‘래퍼 곡선’이란


1974년 백악관 수석 보좌관인 도널드 럼즈펠드는 미국 워싱턴D.C.의 한 식당에서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인 아서 래퍼와 마주한다. 래퍼의 예일대 클래스메이트이며 럼즈펠드 밑에 있던 딕 체니와 함께하는 저녁 자리였다. 30대 초반의 의욕 넘치던 경제학자 래퍼는 세율과 정부 수입에 관한 주장을 펼치다가 냅킨에 종(鐘) 모양 곡선을 그려 설명한다. 이 간단한 곡선이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 감세(減稅) 정책의 이론적 기초가 된 ‘래퍼 곡선’이다. 이 곡선은 또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등 미국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에서도 핵심적 도구 역할을 했다.

이 곡선은 세율이 적정선 이상으로 올라가면 오히려 조세 수입이 줄어드는 기(奇)현상을 설명하면서 세율을 내려야 경제가 살고 나라 살림도 튼튼해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1차 오일 쇼크에 따른 경기 침체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미국 경제를 위한 제안이었다. 1978년 이를 래퍼 곡선으로 명명한 것은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기자 주드 와니스키였다. 후일 레이건 행정부의 참모들이 이 공식을 그대로 정책으로 옮기게 된다. 이 곡선은 감세와 규제 철폐 등을 골자로 한 공급주의 경제학으로 완성된다.

공급주의 경제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경제학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던 케인스의 ‘수요 진작(demand pull)’ 이론을 뒤엎은 것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으나 정작 래퍼는 케인스에게 배웠다고 밝혔다. 영화배우 시절 소득의 90%를 세금으로 내 세금을 ‘도둑’이라고 여기던 로널드 레이건은 이를 선거운동의 주요 공약으로 채택하고 이후 정책으로 추진한다. 후일 백악관 비공식 경제 고문이던 밀턴 프리드먼이 재정 적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레이건은 임기 동안 공급주의 경제정책으로 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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