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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스타트업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나… '1000년 기업' 로마의 비결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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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05.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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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서 산적과 양치기의 촌락으로 시작되었다. 700여 년의 성장기를 거쳐 지중해 전역을 석권하는 제국으로 발전하고 200여 년간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다. 로마제국의 장수 비결은 뭘까. 전문가들은 개방성에 기초한 리더십과 군대에서 비롯된 시스템의 결합을 성공 원인으로 꼽는다. 오늘날 변방의 스타트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과정에 비유되는 로마의 성공 비결을 분석한다.

1 굴러온 돌이 에너지가 된다

민주정치를 표방했던 그리스인에게 시민이란 '피를 나눈 자'였지만, 로마인이 생각하는 시민은 '뜻을 같이하는 자'였다. 로마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피부색과 출신 지역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공동체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로마가 역사상 수없이 명멸했던 정복 민족으로 끝나지 않고, 유럽·아프리카·아시아에 걸쳐 다인종·다민족·다종교·다문화로 구성된 공동체로 발전하였던 원동력이 개방성이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촌락에서 시작했으나 탁월한 리더십에 공존공영의 시스템을 결합해 1000년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진은 서기 80년 완공된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 로마시 이미지 크게보기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촌락에서 시작했으나 탁월한 리더십에 공존공영의 시스템을 결합해 1000년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진은 서기 80년 완공된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 로마시
고대 세계에서 전쟁의 패배자는 죽거나 노예가 되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정복한 부족을 죽이지 않았고 심지어 유력자에게 원로원 의석을 제공해 로마의 지도층으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동화 정책은 로마를 고립된 오아시스가 아니라 개방된 저수지로 만들었다. 로마의 권역에서 발달된 수학·철학·문학·예술·건축 등 모든 문물이 저수지로 흘러들어 융합되면서 수준 높은 로마 문화로 발전했다.

로마가 개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실력주의가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변방의 식민지 출신들이 시민권을 획득해 공동체로 편입되고 해방 노예가 시민이 되는 개방적 사회에서 체제가 붕괴되지 않은 요인이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이 가지는 프리미엄은 인정했지만 비천한 신분에서 출발한 사람도 자신의 실력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로마 제정 중기의 페르티낙스(126~193)는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로 죽었다.

로마 역사를 관통하는 사회적 유전자(DNA)였던 개방성도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로마인 스스로 땅에서 만들어 갔다.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포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개방 정책은 로마의 권역이 확대될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로마가 폐쇄적인 승리자의 집단에 머무르지 않고 개방적인 리더십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2 리더십, 노블리스 오블리제

로마에는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로마는 지도자 육성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체득하는 실질적 경험을 중시했다. 또한 명문가 출신일지라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면서 자신의 역량을 입증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군 복무로 시작해 회계감사관·법무관 등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단계를 거쳐 가며 국가 지도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검증받았다. 선천적 역량을 후천적 경험으로 숙성시키는 시스템으로 우수한 지도자가 지속적으로 충원되었다. 또 현실과 괴리된 이상론에 도취된 선동가가 급부상하여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위험을 최소화하였다.

실력주의 사회인 로마에서 지도자의 필요조건은 현실 문제에 대처하는 역량이었고 충분조건은 솔선수범하는 윤리 의식이었다. 공화정 초기 현직 집정관인 루키우스 브루투스(BC 545~BC 509)는 국법을 위반한 자신의 두 아들을 사형시키면서 법치의 토대를 만들었다. 로마의 지도자층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정신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였다. 건국 초기에 지도층을 형성한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무기를 들고 나가 앞장서서 싸웠다. 이들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바치는 것으로 모범을 보였다. 건국 당시 원로원 의원 100명을 구성한 로마의 전통 깊은 귀족 가문은 500년 뒤에는 그 숫자가 20% 이하로 줄어들었다.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대가 끊어진 경우도 있지만, 정복 국가인 로마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전투에 귀족 계급이 적극적으로 참전해 많은 수가 전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통은 후일 지도층으로 편입된 평민 출신들에게로 이어졌다.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높은 수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리더십을 유지하고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3 매뉴얼·시스템이 움직인다

탁월한 리더십에 시스템이 결합되면 최고의 조직이 탄생한다. 로마군의 강력한 전투력은 체계적인 시스템에서 출발했다. 공화정 로마의 시민군 체제에서는 군대를 1년 단위로 편성했다. 일반 병사는 물론 지휘관과 장교까지 매년 재편성하는 구조에서 인수인계는 중요했다. 로마인들은 부대 편성에서 훈련, 전투 행위에 이르는 프로세스마다 가능한 모든 부분을 매뉴얼로 만들어 대처했다. 정교한 매뉴얼, 엄격한 군율,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로마군단의 전투력은 민회에서 지휘관과 장교를 선출하는 시스템으로 완성되었다. 참전 경험이 있는 시민들이 지휘관과 장교만큼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선출했다. 당시 오리엔트 군주국처럼 궁정 정치에는 능란하지만 현장 지휘력은 떨어지는 무능한 군인들이 사령관을 맡는 경우는 드물었다.

"로마군은 곡괭이(건설 장비)로 싸우고 병참으로 이겼다"는 평판도 참호·식량·무기·도로 등 물질적 요소를 먼저 정비하고 사기와 투지 등 정신적 요소를 극대화하는 시스템에서 비롯되었다. '무적의 로마군단'이라는 별명도 패배하더라도 신속히 만회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갈리아나 오리엔트의 군대는 지휘관이 전사하면 부대 전체가 무너졌지만, 로마군은 공백을 바로 메우는 시스템에서 구별되었다.

군대에서 발전된 시스템은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로마 전역을 핏줄처럼 연결한 도로와 도시 기반 시설인 상하수도 등 사회간접자본의 건설과 유지가 대표적이다. 합리적 세금 제도는 시스템의 백미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평화는 무거운 과세를 통한 약탈 행위가 아니라 가볍고 공정한 과세에 있다고 믿었다.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BC 63~AD 14)는 '넓고 얕은 세금 징수'를 세제의 근간으로 삼았고, 낮은 세율은 200여 년 동안 유지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4 분업… 따로 또 같이

정복은 하드 파워로 충분하지만 패권 유지는 소프트 파워가 필요하다. 로마인들이 구축한 세계 질서의 생명력은 '강한 힘'과 '상호 이익'이라는 두 축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패전국은 식민지로 편입됐다. 하지만 건국 초기 로마인은 정복에 이어지는 식민지 확대가 아닌 동맹 방식의 연합 형성이라는 네트워크 확장의 개념을 창안했다. 승자인 로마는 패배자에게 국방·외교를 제외한 행정·법률·언어·종교 등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했다.

연합 체제의 핵심은 공존공영의 윈윈(win-win) 구조였다. 로마가 정복지를 직접 통치했다면 군사력 팽창에 따른 재정 확대와 세금 증가가 불가피하고, 피정복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면 군사력을 증강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하지만 로마는 패전국과 동맹 관계를 설정하고 자치권을 인정하는 안정화 정책으로 통치 비용을 감소시켰다. 동맹국 입장에서도 로마연합 가입은 냉정한 생존의 국제 질서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로마연합의 개념은 후일 이탈리아를 넘어 북아프리카·오리엔트·갈리아·브리타니아로 확장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외교적 동맹은 경제적 측면에서 국제 분업 구조에 기반한 상호 이익 네트워크로 심화되었다. 에트루리아인은 토목, 시칠리아인은 식량 생산, 카르타고인은 무역, 그리스인은 교육과 의료, 게르만인은 기병 전력을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공존공영의 구조가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고 평화를 유지하며 번영하는 기반이었다.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제국 전체에서 17~45세 남자 5000만명 가운데 500만명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 10%의 시민권자로 제국이 안정되었을 정도로 로마연합의 구조는 강력하게 작동했다.

軍·종교·法 세 번 통일한 천년 제국

로마는 로물루스가 BC 753년 테베레 강변에서 건국한 이후 244년 동안 왕정이 유지되었다. BC 509년 7대 왕이 폐위되고 매년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1개월씩 번갈아 통치하는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탈리아 반도를 석권하고 지중해로 진출하면서 당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페니키아 민족 계열의 카르타고와 맞붙은 포에니 전쟁(BC 264~BC 146)이 일어났다. 코끼리를 앞세워 알프스 산맥을 넘어온 한니발 군대에 패퇴하면서 국가 파멸의 위기를 맞았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활약으로 승리하면서 지중해 연안을 석권했다.

성공 후의 분열과 위기는 로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계층 간 갈등이 격화되면서 원로원파 술라와 평민파 마리우스 사이에 내전(BC 88~BC 80)까지 발발하였다. 구원투수로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BC 44)가 등장한다. 갈리아 정복(BC 58~BC 51)으로 확보한 정치적 입지를 바탕으로 혼란을 정리하였으나 암살당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린다. 황제정을 시작한 후계자 아우구스투스(BC 63~AD 14)가 정치·군사·사회 등 전방위 개혁을 추진하면서 안정기에 들어선다. 최전성기인 5현제 시대(96~180)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이후 로마는 쇠퇴기에 들어선다. 동로마와 서로마의 분열(395)에 이어 서로마가 게르만족에게 패망했다(476).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는 1456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면서 로마의 역사는 끝났다.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인 루돌프 폰 예링(1818~1892)은 "로마는 세 번 세계를 제패하고 통합시켰다. 첫 번째는 군사력으로 국가의 통합, 두 번째는 기독교로 종교의 통합, 세 번째는 로마법으로 법의 통합을 이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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