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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창조하게 하리라" 파나소닉·NEC, 실리콘밸리에 혁신 거점 세워

이위재 차장 | 하미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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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02.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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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로 가는 日 전자 기업들


파나소닉이 2017년 실리콘밸리에 세운 혁신 거점 ‘Panasonic β(베타)’에서 직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 파나소닉 이미지 크게보기
파나소닉이 2017년 실리콘밸리에 세운 혁신 거점 ‘Panasonic β(베타)’에서 직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 파나소닉
2017년 파나소닉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애플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즐비한 미국 쿠퍼티노에 파나소닉의 혁신 거점인 '파나소닉 베타(Panasonic β)'를 설립하고 기존 파나소닉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상에 도전하고 있다.

파나소닉은 2017년 4월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인 독일 SAP의 바바 와타루(馬場渉) 부회장을 이노베이션 본부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당시 쓰가 가즈히로 사장은 "필요하다면 외부 인재를 영입해서라도 혁신을 주도하겠다"고 말해왔다. 바바 본부장은 WEEKLY BIZ와 인터뷰에서 "지난해 이곳 맞은편에 새롭게 들어선 애플 신사옥을 매일 바라보면서 세계 1위 탈환을 다짐하곤 한다"면서 "아이폰이 이룬 성과에서 보듯 이제는 기능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디자인에서 혁신을 일구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파나소닉이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실리콘밸리에 별도의 혁신조직을 둔 이유는 뭘까. 바바 본부장은 "실리콘밸리는 수십억명의 세계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기술이 집약된 곳"이라며 "이러한 심장부에 거점을 두고 다양한 기술 트렌드와 사고방식을 흡수하면서 제품 개발에 임하는 것이 파나소닉 혁신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파나소닉 "제품 개발은 속도전"

파나소닉β는 제품 개발 방법부터 기존 파나소닉 방식과 다르다. 세탁기·TV 등 37개 사업부로 운영되고 있는 파나소닉 조직틀을 벗어던졌다. 정해진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상부 결재를 먼저 받아야 하는 제약도 없다. 이곳에서는 소파에 앉아 수시로 직원 간에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이뤄짐과 동시에 디자이너가 그 자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컴퓨터로 직접 그래픽화한다. 소수 인원이 아이디어를 내고 시제품 제작, 제품화까지 한꺼번에 진행하면서 기능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디자인 등 종합 역량을 키워간다. 이런 과정에서 직원들의 자유로운 발상과 스피드를 우선시한다. 1호 프로젝트인 '홈엑스(HOME X)'는 4개월 만에 약 1300건의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그중 시제품 제작에 80여 건이 넘겨져 최종 3건의 아이디어가 제품에 반영됐다.

파나소닉이 제품 개발의 스피드를 강조하는 데는 과거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아이로봇사가 2002년 발매해 큰 히트를 기록한 로봇청소기 룸바는 파나소닉이 먼저 시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정식 제품을 출시한 건 13년이 지난 2015년이었다. 그사이 룸바의 점유율은 70%에 이르렀고, 파나소닉 제품은 모방상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직 구성도 자유롭게

조직 구성도 자유롭다. β에 상주하는 직원은 일본 본사에서 3개월 주기로 파견되는 30~40명 정도 기술자와 소프트웨어 개발자, 디자이너들로 구성된다. 이 멤버들이 단기간에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제품화 사이클을 경험한 다음, 일본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β의 개발 기법을 전수하는 역할을 맡는다. 설립 6개월 만에 1000개 이상 아이디어의 씨앗이 뿌려졌다. 제품 개발과 제작에 회사 윗선 눈치를 봐야 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토론 후 제품을 먼저 제작해본다. 제품 제작도 수백개 단위 소량주문을 받아 제품을 만들어 판매해 보고 더 좋은 제품으로 개량해 나가는 방식을 취했다.

파나소닉은 지난해 10월 파나소닉 β의 1호 제품인 주거공간용 서비스 '홈엑스'를 일본에서 출시했다. 주택용 조명 스위치 분야에서 파나소닉의 일본시장 점유율은 80% 이상을 차지하는데, '홈엑스'는 이를 활용해 조명과 인터폰, 냉난방, 온수 등을 자동 조절하는 통합 플랫폼이다. 파나소닉은 이어 11월에는 '홈엑스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도시형 IoT(사물인터넷) 주택 '카사트 어번(Casart Urban)' 판매도 시작했다. 무선 인터넷과 센서를 탑재해 벽에 설치한 터치스크린형 디스플레이 하나만 있으면 각 가전제품의 리모컨 없이도 가전기구와 조명의 조절, 문단속 등을 할 수 있는 편리한 주택 플랫폼이다. 예컨대 아침 기상시간에 기상하기 좋도록 방의 조명을 최적 파장으로 조절하거나, 요리를 할 때 레시피를 화면에서 선택하면 조리기계가 자동으로 제어되는 구조다.

NEC, 핵심 사업 실리콘밸리로

글로벌 종합전자기업인 NEC는 지난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기업의 데이터 분석 자동화를 전문으로 하는 '닷데이터(dotData)'이다. CEO에 NEC 출신 37세 기술자를 내정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후지마키 료헤이(藤卷遼平) 닷데이터 CEO는 기계학습 분야 전문가이다.

닷데이터가 하는 일은 기업의 과제 해결을 돕기 위한 데이터 분석 자동화다. 제품 수요 예측을 위해 필요한 데이터 분석과 수집, 수요예측모델 설계 등을 자동화해 AI(인공지능)로 기업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숙련된 '데이터 과학자'가 이 업무를 담당했다. 이에 반해 닷데이터 시스템은 누구나 손쉽게 작동이 가능하고 3개월 정도 걸리던 데이터 분석을 하루로 단축시켰다. 후지쓰 등 대기업들이 이 서비스를 쓰고 있다.

NEC가 핵심 인재와 기술을 실리콘밸리 자회사로 떼어낸 이유는 기존 조직의 스피드 한계 때문이다. 한때 휴대전화와 반도체 등 여러 사업을 거느린 글로벌 전자기업이던 NEC는 경영 악화로 많은 사업에서 손을 뗐다. 전성기 때 5조엔을 넘던 매출액도 현재 3조엔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후지마키 CEO는 "고객수요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세계시장에서 더는 통하지 않겠다라는 불안함이 엄습했다"고 말했다.

스피드에 자율경영도 가미

후지마키 CEO의 직언으로 고민하던 NEC 본사 경영진은 과감하게 닷데이터의 자율적인 경영을 결정했다. 닷데이터는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자금조달과 인사 등 경영 전반 사항을 본사의 결재 없이 처리하는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NEC 자회사 중에서도 이례적이다. 인사제도와 급여체계도 NEC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독자적으로 우수한 인재 채용도 가능한 구조다. 그뿐만이 아니다. 실리콘밸리 현지의 벤처캐피털 등에서 자금을 꾸준히 모은 결과, NEC의 출자 비율이 낮아지면서 자회사 지위도 위태해졌다. 하지만 경영진은 개의치 않는다. 핵심기술 권리도 자회사에 넘겼다.

이 같은 본사 경영진의 결단에 대해 후지마키 CEO는 "몇 년이나 정체를 겪으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NEC 전반에 퍼져 있다"고 말한다. '닷데이터'의 최종 목표는 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인 유니 콘 기업이다. NEC는 반대급부로 '닷데이터'의 기업가치 상승이 장기적으로 NEC의 수익구조에 보탬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닷데이터 제품을 일본에서 독점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다른 일본 기업들도 잇따라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자료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지역에 진출한 일본기업은 2018년 현재 913개로, 2016년(770사)보다 약 20% 늘어났다.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실리콘밸리에 거점을 둔 대표적인 일본 기업으로는 혼다자동차의 연구소인 혼다이노베이션(Honda Innovations)을 비롯해 도요타, 닛산 등 주요 자동차 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2017년에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중고시장앱 메루카리가 실리콘밸리에 진출해 주목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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