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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위협하는 모든 것 베어내고… 500년 '오너 통치' 기틀을 놓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경영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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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10.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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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성의 제왕경영학 〈7〉 조선 태종 이방원의 오너 경영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경영학 석사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경영학 석사
태종 이방원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남이다. 1367년 출생, 고려 말인 17세 때 문과에 합격한 수재였다. 태종은 왕이 된 후에도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했다. 또 야망이 크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은덕을 베푼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다만 국가 대사가 걸린 문제에선 누구도 용서 없이 처단하는 결단력과 실행력이 있었다. 태종이 왕의 국가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제거한 덕분에 아들 세종은 위대한 창조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푸대접받은 창업 공신

이방원은 부친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에서 공을 많이 세웠다. 왕위를 계승할 이는 자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비의 간청에 따라 강비의 둘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방석은 그때 11세였다. 어린 이복 막냇동생이 세자가 됐다는 소식에 26세로 혈기 왕성했던 이방원은 화가 치밀었지만 참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방석의 세자 책봉 뒤에는 신권(臣權) 중심 국가를 꿈꿨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이 있었다. 그들은 왕권 중심 국가엔 폐단이 많다고 생각했고 야망이 크고 능력이 탁월한 이방원이 왕위를 계승하면 조선은 영원히 왕권 중심 절대군주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강비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방석을 세자로 밀어 신권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이방원은 이들을 경계하면서 장인 민제가 소개한 하륜을 책사로 맞이했다. 성리학자이지만 풍수와 관상, 사주에 뛰어난 식견을 가진 하륜은 이방원을 만난 순간 군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러스트=김종규 이미지 크게보기
/일러스트=김종규
실리 추구 경영 철학

이방원이 태조로부터 외면당하고 정도전에게 견제를 받은 지 7년째 되는 1398년 8월 태조가 중병으로 누웠다.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하륜은 젊고 패기가 충천한 26세 안산 군수 이숙번을 소개했다. 이숙번은 안산에서 군사를 데리고 한양으로 왔다. 여기에 이방원의 처남들 민무구·민무질 형제, 정도전에게 불만이 많은 이거이, 조온과 조영무, 사촌 이천우 등이 합세했다.

이방원 군대는 술을 마시던 정도전과 남은,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을 습격하여 죽이고 조정을 장악했다. 병석에 누워 있던 태조는 순식간에 5남 이방원에게 권력을 탈취당해 왕위를 2남 이방과에게 넘겨주고 상왕이 되었다. 이방과가 2대 왕 정종이 되었지만 동생 이방원 눈치만 보다 2년 후인 1400년 왕위를 넘겨줬다.

이방원은 정식으로 조선 3대 왕 태종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라 고려 말 폐단이 많았던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통치 기본 이념으로 확립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부친과 자신이 목숨을 걸고 세운 왕조이기에 왕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주인이 경영해야 한다는 오너 경영 철학인 셈이다. 동시에 태종은 현실을 중시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통치자였다. 조선이 처한 환경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부왕과 정도전처럼 강대국 명나라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을 국가로 유지시키고 백성들 편안한 삶을 위해서는 명나라와 친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머리도 숙여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그래서 비굴하지만 명나라를 상국으로 대하면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뒤로는 명나라 침입에 대비해 군사력도 양성했다.

왕권 위협한 공신 세력 제거

정도전은 조선이 이성계와 사대부들이 함께 건국한 일종의 조인트벤처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은 이씨가 주인인 왕조 국가라는 신념이 강했다. 대신들이 국가를 경영하면 사리사욕과 권력욕만 추구한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래서 신권 통치 철학 소유자라면 누구든 제거해야 했다. 누구도 사병을 소유할 수 없고 왕명만 받드는 군대만 존재해야 했다.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는 야심이 큰 여인이어서 남편이 왕이 되는 데 동생들을 적극 참여하게 했다. 원경왕후 친정은 전부 공신이 되었고 사병을 소유했다.

세자 양녕대군 형제들은 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당시 관습대로 외가에서 성장했기에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과 친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세자가 왕이 되면 세상은 그들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고 교만해졌다. 태종은 처남을 제거해야 세자가 왕이 된 후 강력한 왕권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해 처남들 넷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1398년 1~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운 공신 이숙번도 1416년 관직을 빼앗고 경남 함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숙번은 태종이 사망할 때까지 귀양 생활을 했다.

반대자들 등용해 개혁

태종이 국가를 경영하는 데 중용한 인물들 중에는 조선 건국 반대자들도 있었다. 대부분 이색의 제자이며 정몽주와 가까웠던 성리학자들인 권근과 하륜 등이었다.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 목숨 걸고 조선 개국을 반대했던 황희도 불러들였다. 권근, 황희 등은 신망과 학식이 높았으나 조선 창건에 반대했기에 기득권이 없어 중용해도 왕권에 도전할 수 없었다. 그들의 학식과 경륜을 입맛에 맞게 활용할 수 있었고 인심도 쓰는 일거양득이었다.

태종은 이론가인 이들을 앞세워 조정을 개혁했다. 태종은 왕이 직접 국가 경영을 하는 정부로 전환했다. 우선 중앙 정부는 의정부와 6조 중심으로 조직하고 왕이 직접 6조를 관장하는 직계제로 만들었다. 왕이 6조 판서들(장관)을 직접 불러 명령하고 보고받았다. 의정부 3정승(총리와 부총리)은 자문 역할 정도만 했다. 그리고 지방은 8도로 나누었고 8도 관찰사는 물론, 군수급 지방 수령들도 왕이 직접 임명했다. 간관과 대간 제도는 살려 모든 정책 결정 과정을 기록하게 했다.

장자 상속 대신 충녕대군 선택

태종은 장자 상속을 왕위 계승의 원칙으로 삼아 장남 양녕대군을 10세 때인 1404년 세자에 책봉했다. 그런데 세자는 공부보다 사냥을 좋아했고 17세가 되어서는 여색을 밝히기 시작했다. 태종이 타이르고 꾸중했으나 세자는 "전하께서는 좋아하는 여인을 대궐에 많이 들여 여색을 즐기면서 나는 왜 못 즐기게 하느냐"하는 서신을 보내 반항했다.

태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세자를 폐하려 하자 이조판서 황희는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세자를 폐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태종은 황희를 삭탈관직하고 귀양을 보냈으며 세자를 폐하였다. 왕자들 중 가장 총명한 22세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선택했다. 충녕대군이 나중에 세종이 된다.

세종 장인도 견제하고 제거

태종은 52세 때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 후 2개월이 되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18년 8월이었고 조선 4대 왕 세종이 등극했다. 태종은 세종 처가를 주시했다. 세종의 장인 심온은 개국공신 심덕부의 아들이었다. 심덕부는 태조의 위화도 회군 동지로 태조와 마음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였고 좌의정을 한 권력가였다.

심온은 부친 심덕부의 후광으로 40대 초반에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사위가 왕이 되자 즉시 상왕 태종이 영의정으로 승차시켰다. 심온은 영의정이 되자마자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났는데 환송객이 인산인해였다. 태종은 이 장면을 보고 제거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심온이 명나라로 떠난 후 30년간 태종을 수행한 병조참판 강상인이 병조에 관한 보고를 태종에게 하지 않고 세종에게 했다. 태종은 강상인이 자기를 무시했다고 잡아들여 국문했다. 강상인은 명령 체계는 세종에게로 일원화되어야 한다고 심온의 동생 심정과 논했고 심온도 그렇게 말했다고 불었다. 태종은 심정과 강상인은 처형하고 심온은 잡아들이라 했다. 심온은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받은 후 사약을 받았다. 세종 비 소헌왕후의 모친과 자매들은 관노가 되었다. 세종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세종은 이후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 경영에 매진, 한글과 각종 과학기술을 창조하며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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