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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기업 아닌 사람을 보호하라… 새 기업 생기도록"

최현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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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1.0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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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변하려면?… 폴 로머 뉴욕대 교수의 조언
“특허 개수는 혁신의 성공지표가 아니다 새 기업에 밀려나는 대기업 숫자를 보라”

정부 주도 발전국가 모델 추격자 단계에서만 효과
기존 대기업 보호하면 새 기업·혁신 발생 어려워 경제 전체 위기 처하게 돼
기업 진입 장벽 낮춰야 선도자 단계 경제 가능

무너진 장벽…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월마트·타깃, 美유통시장 진출해 유통 비용 확 낮추며 혁신 이끌어…
시어즈 등 기존 대기업들 밀어내

‘지식 독점’ 욕심 내려놔야 혁신 생겨
美정부, 셰일가스 채굴 정보 공개 최고의 채굴법 빠르게 확산되고
송유관 독점 막아… 모두에 개방

2015년 유로존, 불황에 빠질 위험
독일, 南유럽 구조 개혁 방법으로 노동비 줄이는 ‘장기불황 전략’ 채택
“윤리적 문제 있어… 반발 불러올 것”


폴 로머 교수는 정통 경제학자와 전 세계 빈곤 퇴치운동가라는 두 가지 가치를 함께 추구해왔다. 지난달 플라자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시종일관 성실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답변을 이어갔다.
/남강호 기자
폴 로머 교수는 정통 경제학자와 전 세계 빈곤 퇴치운동가라는 두 가지 가치를 함께 추구해왔다. 지난달 플라자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시종일관 성실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답변을 이어갔다. /남강호 기자

30대에 경제성장에 관한 새로운 이론으로 경제학의 지평을 바꿔 놓은 천재 학자, 노벨 경제학상 단골 후보,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제의를 거절하고 후진국 개발 운동에 나섰다가 '신식민주의자'란 비판을 받은 이단아.

폴 로머(Paul Romer·60) 뉴욕대 교수에겐 늘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 대단한 인물을 만난다는 긴장감은 그를 만난 지 5분 만에 눈 녹듯 사라졌다. 첫인상은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했다. 오전 7시 30분쯤 서울 플라자호텔 로비에서 만나자마자 그는 "우선 아침 식사부터 하자"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전날 부산에서 대한상의 주최로 열린 '한·아세안 CEO 서밋'에 참가하고 밤에 서울로 이동한 다음 날이라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10대 소년처럼 눈빛이 반짝였다.

그가 과거 로체스터대 조교수로 있을 때였다. 임용 후 3년이 지나도록 논문을 한 편밖에 내놓지 못하자 교수 회의에서 재임용은 시켜주되 구두 경고를 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일반균형이론으로 유명한 원로 교수 라이어널 매킨지가 "폴이 평범한 논문을 양산하는 학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 지금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만류했다. 과연 그는 임용된 지 5년이 지나 지식의 상품화와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임을 규명하는 '내생적(內生的) 경제성장 모형'을 발표하면서 세계 경제학계를 흥분시켰다. 로머는 이 논문이 화제를 부르면서 모교인 시카고대 정교수로 영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전 세계 빈곤 퇴치와 저개발국 도시화 운동에 앞장서는 행동가로도 유명하다.

추격자에서 선도자 되려면 더 많은 경쟁을 허용해야

―많은 사람이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 갇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발전의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까?

"어느 경제건 추격자(follower) 단계에선 급속 성장을 하지만 선도자(frontier)에 접근하면 항상 성장률이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저성장에 실망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공을 이뤄낸 국가에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신호입니다."

로머 교수는 선진국이란 용어 대신 선도자란 용어를 사용한다. 다른 나라보다 소득 수준이 높다고 해도 혁신할 능력이 없으면 선진국은 될지언정 선도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도자로 가기 위해 정부는 어떤 정책을 펴야 합니까?

"경제 운용의 스타일이 변해야 합니다. 각 부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더 많은 경쟁이 일어날 수 있게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추격하는 동안에는 소위 '발전 국가 모델'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성장을 유도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무시하고 국가 개입 성장 모델을 추구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저는 아시아 국가들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모델이 선도자 국면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는 미국 통신 시장을 예로 들었다.

"미 정부는 1984년 AT&T를 수십 개의 지역별 통신회사(베이비 벨)로 해체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두려워했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진보였습니다. 애플, 퀄컴 같은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하고, 구리선 대신 광(光)케이블 시대가 열렸습니다. 때로는 친숙하지 않은 것을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선도자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본은 소득과 도시화 수준이 높고, 뛰어난 기술들을 개발해 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자유와 경쟁을 촉진하는 단계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스타트업이 거의 없고, 젊은이들에게 기회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좀비 은행, 좀비 기업은 기존 기업을 보호하려는 '보호 충동(protective impulse)'의 증거입니다."

―한국도 창업 기업이 커 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떻게 바꿔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기존 기업들을 보호한다면 새로운 기업이나 새로운 혁신이 발생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기업을 보호하기보다는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기업에서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기업을 보호하려다 보면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핀란드의 노키아를 봅시다. 만약 노키아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경제적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면 노키아의 쇠락과 함께 경제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한국 정부가 교수님에게 혁신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묻는다면 뭐라고 충고하시겠습니까?

"정책의 핵심은 성공을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저라면 혁신 정책의 성공 지표로 특허에 집중하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기업들의 진입률을 지표로 삼을 겁니다. 나아가 새로운 기업에 밀려 도태되는 기존 대기업의 개수를 성공의 신호로 생각할 겁니다. 미국 소매업은 월마트와 타깃이 진입해서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습니다. 특허는 당신의 시스템이 이런 종류의 새 기업들을 허용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기업보다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로머 교수의 말은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던지는 경고로 들렸다.

―한국 경제도 너무 삼성에 의존한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삼성은 매우 어려운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소니는 한때 소비자 가전에서 최고였지만 시장 환경이 변하면서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삼성이 잘하고 있지만, 그 시장은 매우 경쟁적입니다. 심지어 애플조차도 10년 후에는 소니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규칙을 바꿔라, 혁신이 촉진되리니

―내생적 성장 이론에서 교수님이 강조한 ‘아이디어’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내생적 성장 이론의 요점은 정부가 정책 변화를 통해 더 빠른 혁신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키워드 참조〉. 내생적이란 건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이 변하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중국은 왜 미국처럼 셰일가스 산업이 빨리 발전하지 못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미국보다 중국에서 이 분야의 지식재산권이 더 강하게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수많은 중소 셰일가스 생산자는 셰일 유정을 채굴할 때 매번 새로운 방법을 실험합니다. 모래 양을 달리해서 얼마나 많은 석유를 얻어내는지 알아보는 겁니다.(셰일가스는 대량의 물과 모래, 각종 화학 물질을 혼합한 용액을 지하 퇴적암층에 쏘아 가스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이때 혼합 비율이 중요하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이 데이터를 공유하도록 합니다.(미국은 대부분 주에서 셰일가스 생산 과정에서 상수원 오염 등을 우려, 셰일가스 채굴에 사용되는 용액의 구성 물질과 혼합 비율을 공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2010년 와이오밍주가 최초로 강제한 이후, 다른 주들도 비슷한 규제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모든 셰일가스 생산자가 더 좋은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국에선 정부가 국영 석유회사들에 독점적으로 채굴권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식을 독점하지 않은 게 혁신을 낳은 셈이네요.

“그렇습니다. 셰일 산업 발전은 얼마나 시장이 위대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동시에 얼마나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지도 보여줍니다. 의도했건 아니건 화학 물질 공개가 지식을 공유하도록 해서 관련 산업의 혁신을 가능케 한 겁니다.

셰일 산업이 발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송유관입니다. 미국 정부는 셰일가스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전국에 깔린 송유관을 대기업이 독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종의 공공재와 같았기 때문에, 다코타든 펜실베이니아든 미국 어느 곳에서라도 석유를 생산한 사람은 누구나 송유관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소업체들도 대기업과 경쟁하며 가스를 전국에 팔 수 있었습니다. 전사적 품질 관리(TQC)나 린 생산방식(lean production)의 예를 보면 지식의 확산이 우리 모두에게 혜택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 생산 방식으로 잠시 동안은 도요타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것이 확산되면서 모두가 따라 하게 됐고, 모두의 생산성이 증대됐습니다. 지식의 확산이 한쪽에 해가 되는 전쟁과 달리, 경제적으로는 지식 확산이 모두를 더 나아지게 합니다.”

―내생적 성장 이론은 풍요로운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은 아이디어가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성장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불평등은 발견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 부작용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디어 발견자(혁신자)가 큰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난 이게 맞는 얘긴지 모르겠습니다. 2차대전 동안에 인류의 생활을 바꿔 놓은 수많은 중대한 발견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발견들은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애국심과 같은 뭔가 다른 목적에서 나온 겁니다. 돈 이외 많은 것이 사람들에게 동기가 됩니다. 자선 사업가에겐 세상을 더 좋게 만들자는 동기, 대학교수에겐 위신입니다. 그런 위신 때문에 당신 같은 기자들이 아침부터 호텔로 찾아와서 인터뷰하는 게 아니겠어요(웃음)?”

―미국은 부자도 많고 불평등도 심합니다.

“맞습니다. 미국은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동시에 혁신적입니다. 불평등이 심화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세율 인상 제한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작은 정부’를 지지합니까?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역사적으로 진자 운동을 거듭해 왔습니다. 대공황 후 사람들은 시장경제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지 우려가 컸습니다. 이로 인해 20세기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는 정부가 경제 통제 면에서 극단적으로 강한 정부 형태였습니다. 이후 20세기가 진전되면서 우리는 정부가 경제에 훨씬 적게 개입해도 여전히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도 있다는 걸 깨닫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반적으로 20세기 문제가 너무 강한 정부였다면, 21세기 문제는 너무 약한 정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혁신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겁니까?

“정부의 역할에 대해 대립하는 양 진영이 있습니다. 한쪽은 정부가 전혀 필요 없다는 쪽이고, 다른 쪽은 정부가 마치 건축가처럼 빌딩의 모양을 결정하고 창문의 개수까지 미리 결정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나는 중간입니다. 어떤 분야에선 정부가 계획해야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계획은 세부적인 면에는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정부의 역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 역할은 도시 계획 입안자들이 갖는 정도의 권한보다는 훨씬 작아야 합니다.”

로머 교수는 사업가 경험도 갖고 있다. 스탠퍼드대 교수 시절인 2000년 온라인 교육 기업을 창업해 키운 뒤 2007년에 매각했다. 교과서는 무료로 배포하되 숙제 문제들은 온라인으로 올리고 유료로 만든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많은 창업을 유도하려면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게 더 나은 방법입니다. 창업 절차를 쉽게 만드는 등 법적 규제를 완화하고, 창업가가 되려는 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유망 스타트업을 선정해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런 것은 정부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정말 걱정된다

―2015년 세계경제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글로벌 금융 위기로 동조화 현상이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차별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회복되고 있으나, 유럽과 일본은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고, 러시아는 유가 하락으로 불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유로존은 또 다른 불황에 빠질 심각한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정말 유럽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점진적으로 성장률을 낮추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중국은 금융 위기 때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제대로 된 부양책을 썼고, 이번에도 잘해낼 거라고 봅니다. 금융시장, 자산 시장은 변동성이 더 커질 겁니다.”

―유럽을 왜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독일은 그리스 등 유럽 남부 주변부 국가들의 노동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기적인 불황(prolonged recession)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구조적 개혁을 이뤄낼 유일한 방법은 고통스러운 불황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독일은 아무도 세금을 내려고 하지 않는 그리스의 문화를 바꿀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불황을 겪도록 하는 게 그런 문화를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큰 고통을 가져오는 그런 방법은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며 반발을 가져올 겁니다.”

실험 도시 프로젝트

로머 교수는 기발하면서도 거대한 실험을 추진하고 있다. ‘차터시티(Charter City)’ 캠페인이 그것이다〈키워드 참조〉. 개도국 내에 하나의 섬과 같은 모델 도시(enclave)를 만들어서 선진국의 법 제도를 적용하는 실험이다.

―차터시티 내에선 행정권까지 선진국 정부에 위임하는 일종의 모델 도시를 만들자고 주장하셨는데, 개도국이 국가 운영을 잘 못한다고 해서 주권까지 제한하자는 말씀입니까?

“선진국들이 매년 수십억달러씩 원조를 하지만 개도국의 발전이 더딘 건 제도상 문제 때문입니다. 반면,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선진국의 법 제도와 자유시장 경제를 갖춘 투명하고 효율적인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차터시티에는 누구나 이주할 수 있게 하되 일부 권리는 유보하고 사회복지 혜택도 최소화해야 투자자를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통치자는 예를 들어 캐나다나 영국 등 선진 민주 정부가 임명하도록 하되, 법에 의한 지배, 위생적 환경, 우수한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도록 하는 겁니다. 매년 수십만, 수백만명이 정치적 이유나 경제적 이유로 모국을 떠나 불법 이민자로 세계를 떠돕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차터시티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겁니다.”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시는 건가요?

“차터시티 이주자들은 도시에 들어온 순간 이미 발로 투표한 겁니다. 개도국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제도를 선진화하고, 이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입니다.”

―동료 학자들조차 교수님을 ‘신(新)식민주의자’라고 비판하지 않았습니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할 땐 그런 비난에는 개의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결과입니다. 개도국의 수많은 사람에게 삶을 향상시킬 기회를 주는 것, 독재자들에게 ‘당신의 국민이 모국을 떠나도 충분히 자유롭고 잘 살 수 있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비난도 감수할 겁니다.”

한 경제학자의 공상으로 보이던 차터시티는 두 차례에 걸쳐 실현 직전까지 갔다. 2009년엔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이 로머 교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하고 시행을 추진했으나, 쿠데타로 정권이 무너지면서 물거품이 됐다. 이어 2010년엔 온두라스 정부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해당 도시 선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차터시티의 운영을 맡아야 할 선진국들이 ‘신(新)식민주의’란 비판을 두려워해 로머 교수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게다가 온두라스 정부가 로머 교수를 배제한 채 미국 투자자와 자유경제구역 개발 계약을 추가로 체결하자 로머 교수는 손을 뗐다.

그러나 로머 교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난 뒤 로머 교수는 기자에게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 지대에 차터시티를 건설하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흥미 있는 아이디어”라고 답하자 그는 “관심이 있으면 전화나 이메일을 하라. 언제든 환영한다”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뉴욕에 오면 꼭 연락 달라. 우리 함께 이 아이디어를 토론하자”였다.


☞내생적 성장 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
경제성장에 있어 기술을 미지의 외부 요인(외생 변수)으로 간주하던 통설을 깨고, 연구개발(R&D)과 같은 의도적 노력을 통해 축적된 기술이 성장을 좌우한다는 이론이다. 전통 경제학은 노동과 자본이 생산량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봤으나, 내생적 성장 이론은 아이디어(기술)를 더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시켰다. 아이디어는 기술뿐 아니라 기술 발전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제도적 측면까지 모두 포괄하는 개념.


☞차터시티(Charter City) 캠페인
개도국 내에 선진국의 법·제도를 이식한 모델 도시를 투자를 유치해 만든 뒤 제3세계 이주민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교육 기회를 제공, 개도국의 성장을 촉진하자는 캠페인.


폴 로머 교수는
‘기술이 성장을 좌우한다’는 내생적 성장론으로 돌풍 온라인 교육기업 창업도


로머 교수가 걸어온 길은 통념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의 내생적 성장 이론은 경제성장에 있어 기술을 미지의 외부 요인으로 보던 통설을 깨고, R&D 등을 통해 내적으로 양성된 기술이 성장을 좌우한다는 내용으로 경제학계를 뒤흔들었다. 폴 크루그먼 교수가 “198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1990년대 성장 이론 연구자들은 상당수 로머의 통찰에 기반했다.


2000년에 그는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온라인 교육 기업을 창업해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가 회사를 키워 지분을 매각하고 나온 2007년 세계은행은 그에게 수석 이코노미스트 자리를 제안했다. 로런스 서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스타 경제학자들이 맡아온 자리다. 그러나 로머 교수는 이를 거부하고, 기발하고도 대담한 구상을 주창하는 행동가가 됐다. 개도국에 하나의 섬과 같은 모델 도시를 만들어 선진국의 법·제도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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